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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진혼곡(鎭魂曲, Requiem) 다시 울리려나…

뉴욕일보 | 기사입력 2024/03/18 [23:58]
> 살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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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진혼곡(鎭魂曲, Requiem) 다시 울리려나…
 
뉴욕일보   기사입력  2024/03/18 [23:58]

 

  © 뉴욕일보

 

전쟁터에는 전투원이나 민간인이나 가리지 않고 헤아릴 수 없는 목숨이 슬어진다. 인류는 유사 이래 부족 간, 종족 간, 국가 간 수많은 전쟁을 치러왔다. 그 난리 통 속에서도 우리들의 선조는 질긴 목숨을 지탱하여 오늘날까지 우리가 생명을 이어 왔다.

 

전쟁통에 군인이 적을 죽이는 것은 합법적인 살인 행위다. 그래야 계급도 특진 되고 훈장까지 받아 영웅 칭호를 받기도 한다. 인간들은 본래 잔인한 본성이 있어 살상행위를 즐기려 갖가지 경기를 만들어 즐긴다. 권투, 레슬링, 투계(鬪鷄), 격투기(UFC) 등에서 피를 보면 더욱 흥분하고 광분한다.  

 

유튜브에서 보면 작은 몸집에 눈동자만 빛나는 최두호 격투기 선수가 있다. 그가 거구의 서양인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장면에 관중은 환호하고 아나운서는 코리아를 외친다. 경기장 매트는 피로 얼룩지고 선수들의 얼굴은 부어올라 흉물처럼 변한다. 관중들은 환호하고 경기장은 뜨거운 열기로 채워진다. 옛날에 한국에서 모 레슬링 선수가 ‘레스링 경기는 쇼 이다’라고 하여 한국 레슬링계에 찬물을 끼얹은 적도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야구, 축구, 럭비는 신사 경기다. 

전쟁을 겪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생애 최대의 격투를 경험한 것이다. 그 세대는 지나간 전쟁 장면을 활동사진처럼 회고하며 살아남았음에 생애 최대의 희열을 느낀다. 

 

‘북방북방 조왕신(?王神) 남무북방 조왕신’ 

늙으신 어머니는 당산 넘어 백정들만 사는 마을의 장님 박수무당을 불러와 굿을 한다. 무당은 물을 담은 옹기(甕器) 함지박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놋쇠 숟가락으로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독경을 한다. 긴 독경을 하다가 숨을 돌릴 때가 되면 요령을 흔들어 지루한 굿판을 한숨 돌리게 한다. 은비녀로 흰 머리를 쪽진 어머니는 무당 옆에서 북쪽을 향하여 두 손을 연신 비비며 마을에는 난리가 제발 나지말고 가족들의 무사 안녕과 풍년 농사를 기원하며 수도 없이 절을 한다. 

그러한 나의 어머니의 치성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기어이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어느 전쟁치고 참혹하지 않은 전쟁이 있으랴만 한반도 그중 가장 추운 겨울 낭림산맥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 기록을 보면 지금도 오싹한 한기를 느낀다.

 

▲     ©뉴욕일보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는 한국 전쟁의 결정적 전투 중 하나로 미국 해병대 제1해병사단이 주축이 된 유엔군과 중국군이 장진호 및 장진군 일대에서 벌인 전투이다. 1950년 11월 27일, 중국 제9병단은 장진호 지역에서 에드워드 알몬드가 이끄는 미국 제10군단을 기습공격했다. 혹독한 겨울에 잔혹한 17일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3만명의 유엔사령부 병력이 올리버 P. 스미스 소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지만 이들은 곧 포위되었고, 마오쩌둥의 유엔군 격파 지시를 받은 쑹스룬이 이끄는 약 12만명의 중공군이 이들을 공격했다. 유엔군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철수를 위해 싸움을 이어나갔으며 중공군의 사상자를 늘려가며 포위를 돌파했다. 제10군단의 흥남 철수 작전이 유엔군의 북한 철수의 마지막 단계였다. 해병대가 철수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동쪽에서 중공군의 예봉을 맡은 제31연대전투단(페이스 특수임무부대)의 역할이 컸다. 제31연대전투단이 희생을 치르며 시간을 버는 동안, 서쪽의 해병대는 포위되지 않을 수 있었다. 중공군은 유엔군을 북한 동북부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위키백과에서 전재]. 사진은 장진호전투 당시 가장 큰 적은 중공군이 아니라 추위 그 자체였다. 1950년 11월 온몸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미 해병대 장병들의 모습에서 그해 겨울의 혹독한 추위가 느껴지는 듯하다. [사진 출처=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영하의 추위가 찾아오면 육이오 때 장진호 전투에서 죽어간 미군들이 추위와 중공군을 대적하며 싸워서 한반도 공산화를 막아 주었던 그 외국인 군인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흑인 백인 양코배기 서양인들이었다. 요즘 좌파들이 떠드는 점령군이 아니었고 한반도를 위한 구국의 파병이었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인해전술에 밀려 UN군은 후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한다’는 억지 같은 유명한 말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 전쟁의 참상을 그린 한국어 책자도 많다. 마틴러스(임상균 역) 지음 <얼으붙은 장진호>, 고산 지음 <데스퍼레이드 그라운드>(헴프턴 사이즈 박희성 옮김), <브레이크아웃>(마틴러스 임상균 역) 

 

장개석 총통은 그 넓은 중국대륙을 버리고 대만의 섬마을로 줄행랑을 쳤다. 지휘관을 잃은, 휘하 수 많은 남은 병사들은 연줄 떨어진 신세가 되었다. 모택동은 항미원조(抗美援助)의 기치를 달고 주인 잃은 장개석 군졸들을 압록강을 건너 6·25 한국전쟁에 몰아넣어 인해전술이라는 새로운 병법을 만들어 막강한 UN군의 화력에 총알받이로 몰아넣었다. 그들의 보급상태는 열악하였지만 누비 솜옷은 두꺼웠던지 칼빈 소총알이 누비옷을 뚫지 못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모택동은 포로로 획득한 국부군을 한국전쟁에 투입 소모 시켜 골치 아픈 일을 해결했다. 3 개월 전투에 유엔군은 10만3천명 미군 제10군단은 당시 예하 병력이 육군 제3·7 보병사단, 제1 해병사단, 한국군 2개 사단(제3·수도사단)과 적지만 다양한 국가의 UN 참전군으로 편제되어 10만3천명에 달했다. 이 중에서 순수하게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병력만 따지면 제1 해병사단 전체와, 미육군 1개 연대, 영국군 코만도 부대 등 즉 UN군 측에서는 해병대 2만5천 명에 미 육군과 영국군의 병력을 합해 총 3만명 정도가 투입되었고 중공군은 15만명 이었다. 

 

매복 전투에 능한 중공군은 영하 30도 이하의 추위 속에서도 장승처럼 움직이지 않고 잠복하는 중 귀와 코끝 손발이 동상으로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중국은이 장진호 전투에 투입한 제9병단 3개 군의 총 병력은 약 15만명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원래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를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각국은 이 전투의 지명을 장진長津)이 아닌 초신(chosin)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장진의 일본어 발음에 의한 것이란다. 유엔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인 1945년, 일본어로 작성된 지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진이라는 지명도 이런 방식으로 읽히게 되었다.

중국 여행 중 가이드 아가씨는 자기 동네에서도 전쟁에 끌려간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숨 쉬며 푸념을 하였었다. 

 

미국에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장진호 전투 참전 용사회 모임이 있었는데 이젠 잊혀진 전투로 노병들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 해병대 제1해병사단이 주축이 된 유엔군과 중국군이 장진호 및 장진군 일대에서 벌인 전투이다. 참혹하고 처절한 전투에서 산화한 피아(彼我)간의 원혼들을 달래는 진혼곡을 들려 줄 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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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4/03/18 [23:58]   ⓒ 뉴욕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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