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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일보 시론] 어느 1.5세 목사의 소리없는 외침 “나를 따르라…”
 
뉴욕일보   기사입력  2017/03/04 [00:00]

그는 1.5세 목사다. 60이 넘었으니 1.5세로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 한인으론 거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중앙집권적 교단인 감리교 소속이니 1.5세 감리교 목사들 중에 그와의 인연이 없는 목사가 거의 없을 정도다. 

 

30년 전 미국에 첫발을 디뎠을 때에 필자는 시카고서 그를 처음 만났다. 대학캠퍼스에서 한인대학생들을 상대로 특별한 목회를 하고 있던 중에 시카고대학 캠퍼스에서 만났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에 그는 필자에게 목사가 되라고 반복해서 강권 했다. 그 이유로 좀 의식적으로 피했지만 솔직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 이유는 한결같은 그의 믿음 내용과 삶 내용의 일치성이다. 한국인이라는 같은 처지의 거의 동년배로 격동의 시대를 헤쳐 가는 그의 삶에서 30년 이상의 한결같음을 본다.  

 

◆ 한결같은 ‘미국의 한국인’

 

90년대 초반 그는 시카고를 떠나서 주지아 주 애틀랜타로 갔다. 하나님의 이끄심이란 확신이 섰으니 그는 지체 없이 떠났다. 애틀랜타에 한인들이 몰려올 것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이었다. 

 

이민자가 정착한 곳을 다시 떠난다는 일은 삶의 거의 마지막 결단이다. 그는 이러한 한인들의 용기를 고무하고 일상에 위안을 주는 그러한 목회를 했다.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애틀랜타 한인사회의 중심을 만들었다. 

 

수년전에 필자는 20년 만에 애틀랜타로 그를 찾아갔다. 그의 애틀랜타교회는 규모가 너무나 컸다. 수천명의 한인들이 모이는 집회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대형교회의 그였지만 변함없는 시카고 그때의 그였다. 그의 기본은 ‘미국의 한국인’이라는 공동체 의식이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이러한 기본은 털끝만큼도 변함이 없다. ‘교회다, 아니다’, ‘내 교회다, 네 교회다’, 그런 울타리가 그에겐 전혀 없다. 

 

2015년 그가 뉴욕 플러싱으로 왔다. 플러싱은 ‘대륙의 하와이’라고 할, 한인이민의 시작점인 곳이다. 플러싱에서 그가 맡은 교회는 40여년 뉴욕 한인사회의 애환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은 중산층의 한인들이 거의 모두 빠져 나간 곳이지만 아직 덜 정착의 한인이민자들의 생활중심지다. 그는 거기를 지키겠다고 자진해서 옮겨 왔다. 이미 그는 최대 교단의 지도급이고 20여년 이상 눈물과 땀으로 세워온 애틀랜타 최대규모의 교회를 후배 목사에게 넘기고 쓰나미가 휩쓸고 간 것 같은 플러싱으로 자진해서 들어왔다. 

 

◆ ‘본 회퍼’의 외침

 

그는 한인들만이 아니고 플러싱 일대의 같은 처지의 소수계 일일 이민노동자들의 삶속으로 파고들 채비를 한다. 언제 보아도 그는 청년이다. 소명과 의욕. 그리고 20대의 패기를 보기위해서 플러싱 출입이 잦아진다. 

 

그의 메시지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종교가 권력에 무릎을 꿇을 때 선과 악의 판단은 없어진다. 그러면 강제로라도 끌어내려야 할 폭군이 절대자와 동일시된다. 처음에 그는 ‘본 회퍼’를 이야기 했다. 미친 사람이 운전하는 자동차, 그 자동차에 치인 사람의 장례를 치르는 역할보다는 그 미친 운전자로부터 자동차의 핸들을 뺏는 일을 해야 한다고 ‘본 회퍼’를 언급했었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교수형에 처해진 ‘본 회퍼’ 목사가 뉴욕 허드슨 강변에서 기도하면서 독일로의 귀국을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그런 생각에 지금도 변함이 없다. 

 

◆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찬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 필자는 플러싱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는 트럼프의 ‘반(反)이민’명령에 불복종하는 교회운동을 궁리하고 있었다. 서류미비 이민노동자가 가장 구체적인 우리의 이웃이란다. 스스로 그들의 피난처가 되겠다 나선다. 100년 전 조선독립운동에 불을 붙인 천도교인, 불교인, 기독교인들의 영성일치가 오늘 이민자를 보호하는 일에 부활한다고 했다.  

 

3.1절 98주년이라고 동포사회에서도 기념행사가 많다. 우르르 사람들이 모여서 (어딘가로부터 보내온)기념사를 읽고, 3.1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그리고 만세를 부른다. 10년 전의 3.1절 기념행사도 이랬고 작년에도 그랬고 또 올해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이 처해진 상황이 100년 전 대한제국과 또한 똑 같다.  

 

분단국가 출신의 한사람으로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할까? 필자는 그냥 ‘플러싱의 그에게서 배우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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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3/04 [00:00]   ⓒ 뉴욕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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